전태일 평전_우린 어떻게 살 것인가

2019. 7. 14. 01:31독서 하다



우린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그를 알지만, 평전을 통해 그를 읽다보면, 죽음뿐 아니라 그의 삶을 알게 되고, 기억하는 것이 넓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시 던지게 된다. 그의 가난했던 삶은 내가 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서 그 어려움을 뚫고 나가려고한다. 이야기 끝에 아름다운 결말이 있고, 성공이 있을 법도 한데, 그의 삶은 그런 스토리가 아니었다.

전태일의 삶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학교를 다닐 때였다. 가난 때문에 일찍 집에서 나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다 다시 돌아온 고등공민학교에서 그는 충만한 행복을 느낀다. 당시나 지금이나 학교의 한계가 뚜렸했을거지만, 지금의 자리에서 한걸음도 헤어나올 수 없는 사회 밑바닥 인생에서 마주했던 차별에 비하면 학교에서는 노력한만큼 성취가 뒤따르는 평등한 사회였고, 마지막 안전장치로 다가온 것 같다.

그의 교육의 기회는 가정의 상황으로 박탈당한다. 아버지의 기술를 따라 재봉, 재단 기술을 활용해 평화시장에서 자리를 잡아보려고 한다.

전태일도 성공을 꿈꾸었을 것이다. 재단기술을 배워서 옷을 만드는 산업에서 자신만의 전문영역을 확보하고, 자신이 받았던 차별대우, 고된 노동을 자신의 후배나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는 덜 주며, 번듯한 가정을 이루고 자아를 실현하며 살고 싶었을 거다.

그런데, 그는 서서히 성장해간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굴종하고, 그는 비판과 싸워 이기려는 의지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전태일은 마주한 현실에서 몸부림치며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인간성을 열렬하게 지켰다.

전태일은 신문팔이, 삼발이장사, 구두닦이, 그리고 평화시장에서 시다, 재단보조, 재단사의 직업을 산다.

가난한 이, 배우지 못한 이들의 삶을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상상하기란 어렵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글로 남기지 않고, 그런 삶을 우린 멸시하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런 삶에서 벗어나 자수성가한 창업가들의 인생역전 스토리의 도입부로 가난했던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시대운을 타고 그 자리까지 갔음을 망각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높은 벽을 헤아리지 못할때가 많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은 얼마되지 않는 돈을 위해 자신의 양심과 인간성을 팔며, 생을 연장하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사람들을 서로 멸시하며 친구되지 못했다. 제일 속상하면서 공감되는 부분은 서로를 멸시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특정인들이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들 스스로 가지고 스스로도 자신을 비하하고, 자신들끼리도 친구되지 못한다. 왕따가 된 학생들이 반에 있다고 치면, 그들끼리 끈끈하게 지내며 위기를 뚫고 나가면 좋으련만, 그들 스스로도 서로를 무시하고 왕따가 될만한 짜증나는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며 계속 모래알처럼 지내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전태일이 경험한 사회는 우리도 경험한 사회의 속성인데, “착실”, “겸손”, “온건”, “성실성”, “적응성 있다”, “인내”, “순응” 등의 용어를 훼손시켜버렸다. 늦게까지 군소리 없이 야근하면 성실한 직원이고, 부당함을 요구하고, 칼퇴하고, 의사를 피력하면 싸가지 없다고 하며 구워삶으려고 한다.

군대에서 사람된다는 말이 있지만, 그 때에 인간은 자신이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강자의 지배에 도전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온순한 사람이 되는 적응할 줄 아는 유형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전태일은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돕는다. 그의 삶을 알게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스탠스를 다시 조정하게 된다. 나는 세상에서 어떤 태도로 사랑 받고 인정 받으려고 하는가. 순종적인 사람, 알아서 바닥을 기는 사람으로 개념있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면 정신 차려야 한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 달콤한 다독임에 속아 자신의 청춘을 누군가의 배의 기름 속에 녹였다.

당당하자. 바닥을 기는 태도로 개념있다는 소리를 기대하지 말자. 주관을 표현하고, 그에 걸맞는 실력을 키우자.

전태일은 없는 형편에 빚을 내서 근로기준법 해설서 책을 사서 읽고 또 읽는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타개할 진정한 공부를 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현실에 뿌리 둔채 폭 넓게 넓혀나간다. 이것이 참다운 공부다. 내가 처한 자리에서 문제를 뚫고나가기 위한 방책으로 든 책, 독서, 헛똑똑이들이 공부가 아닌 진정한 공부를 한 것이다.

전태일은 사랑하므로 존재가 커나간다. 그는 없는 자였지만, 스스로 없는 자임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진정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바로 없는 자들을 보며 아파한 마음 때문이었다. 시작은 어린 나이에 착취당하는 시다들의 삶을 보면서 였다. 하루 장시간의 노동, 격주에 한번 쉬는 일정, 바쁜 시기에는 잠깨는 약을 먹고 몇일을 밤 새는 상황, 그러다가 병을 얻어 나가는 처지. 이런 환경에서 그는 저항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정직하게 애써도 아무리 근면, 검소, 절약했어도 부유한 자들이 판 치는 사회 현실 아래서는 자신의 품위나 인격, 존엄을 유지할 수 없는 인간상을 마주하며 때때로 그들을 경멸하고 욕했지만, 결국 그것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거라는 것을 깨닫는다. 격을 잃은 우리를 향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는 것. 품위를 일은 우리를 향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런 시작이 모두를 행동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를 행동하게 한 것은 종교의 어떤 계시도 아니었고, 사상에 대한 맹렬한 확신도 아니었다.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사람들의 연결됨이었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이 그를 행동하게 했다. 가장 느끼기 어려울 것 같은 처지인데, 그는 한 사람의 신음소리에 함께 아파한다.

그가 그렸던 평화시장에서 본 기업주의 초상은 최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며, 그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를 착취하고, 소비자 대중을 희생물로 삼았다. 또한 위선자였다. 자신이 마치 노동자의 아버지인양 은혜 베푸는 자 인척 하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기름 짜내듯이 짜낼려고만 하고 어떤 애정이나 관심이 없었다.

이런 기업주들의 착취는 사회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만들어져 지배권력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가 근로감독관을 찾아가고 노동청을 찾아갔을 때, 마주했던 현실을 보며 사회가 기업주의 죄를 묵익하고 있음을 직시하게 되었다. 정치가도 신문도, 종교인도 지식인도 어느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들을 더욱 살찌기 위한 밑거름으로 사용하는 기업주들의 모습이 이 사회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척도라고 생각했다.

전태일은 자신이 택한 저항의 길에서 그저 주어진 현실에 순종하면서 남들처럼 안일한 생활을 추구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 때면, 그것이 결굴은 감방 안에 갇힌 죄수가 감방 벽의 돌담에 화려한 그림을 그려놓고 자기 도취에 취한 꼴이라고 어리석은 행복의 환각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인간의 참된 기쁨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데 있는 것이고, 오늘보다 내일이 낫도록 노력하는 것이 참된 인생의길이라고 그는 거듭거듭 확인하였다.

우리는 전태일의 죽음으로 그를 처음 알게 되었고, 죽음으로 그를 기억하지만, 그는 평화시장에서 노동 문제로 인해 여러가지 시도를 한다. 바보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삼동친목회라는 모임으로 발전시키고, 신문에 평화시장에 노동현실을 내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 기업을 만들기 위해 구상하고, 꽤 오랜 시간 집요하게 시도한다.

한인간이 현실을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 현실에 철저하게 저항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변혁할 수 있게 된다.

평화시장 들어온지 6년, 전태일의 노력은 결국 데모로 귀결된다. 데모는 시위로 번역되는데, 상대편의 양심이나 자비심이나 동정심을 구걸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 쪽 편의 실력을 배경으로 한 상대편에 대한 압력이다. 제발 이렇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 데모가 아니라, 이런데도 네가 말을 안듣고 배기겠는냐 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진정한 호소만으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 될 수 없다. 억압자의 마음이란 출애굽기 바로왕의 마음이 상징하듯이 굳고 완고한 것이다. 억압자 개개인이라기 보다는 권력의 윤리, 억압자의 속성이다. 그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진정이나 호소로 아무리 목메어 두드려보았자 무슨 소용이란 없다. 결국 자극을 주는 행위는 시위였다.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폐되어 껍데기를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이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라고 썼다. 한 인간이 그의 인간성을 풍성하게 하는 과정은 곧 좁은 자아의 환상을 버리고, 그 껍데기를 깨고, 자신과 이웃에 대한 참되고 순수한 관심의 햇살이 비치는 곳으로 향하여 나오는 과정을 뜻한다. 참된 소망, 참된 사랑, 참으로 순수한 그리움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참되다는 것은 옳은 일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바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몇차례 걸쳐 약속을 어기고, 미룬 평화시장 업주들과 경비측과 형사들은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마하고 요구를 지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대로 죽음으로 맞섰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그리고 그는 내죽음을 헛되이 하지말라고 하였다.

전태일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너무 많은 부분들을 건드린다. 비굴하게 살아오는 우리네 인생을 향해, 굴종하고 저항하기 포기한 우리 정신을 깨운다. 참된 공부와 참된 행동이 어디서 오는지 가르쳐준다.

1948.9.28-1970.11.13